“몸은 관이고 빛이며 의식의 순환이다. 관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본다. 꿈을 꾸면서 의식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부터 막힘에서 헤쳐나올 수 있었다. 꿈에서도 공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염원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죽음은 아(我)라는 즉 나라는 상이 없어지도록 죽어야 한다. 항상 깨어 있으려는 생각, 자연에 순응하려는 생각에 깊이 들어가면 선(禪)에 닿는 것이고, 내 것 네 것이 따로 있는가의 물음으로, 요구하지 않으면 부딪힐 일이 없으며, 꿈은 현실이고 현실이 꿈으로 하나가 되면 선(禪)에 이르게 된다.” 김연주의 그림에 대한 단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과 자신을 추스르는 명상을 통해 선의 길로 이어진다. 생각하는 만큼 그림이 위로가 되지 않을지라도 좀더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 5년 전 동생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끝과 시작이 하나인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동생이 떠난 그 곳도 같은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누나, 이제 내가 사는 곳에서 내려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는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각성의 의미가 있으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방향임을 새롭게 느끼면서 오늘 지금 한 생각이 과거이고 미래이며 현재의 중요한 순간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화면은 지평선, 하늘, 바다, 유유히 흘러 다니는 형상 혹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마음을 표현하는열린 공간이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색채와 붓질이라는 속도와 흐름으로 담고자 한다. 따라서 보여지는 색과 형상은 마음으로 이입되어 무작위라는 작위적 색채와 결합되면서 시간의 숙성을 통해 붓질로 이어진다. 바람, 물결의 흔적이 붓끝에서 농익도록 손맛의 대침을 얻었을 때 화면은 이미 자연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지우고 칠하는 반복의 여과는 미술치료사가 환자와 수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의 만남을 이어가듯이 면과 색채와 흐름의 감흥을 화면과의 교감을 통해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각인된 모습은 이미지만 남아 찰나의 시간이 공명의 울림으로 환원되어 공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김연주는 중학교시절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동산 밑 둥지를 틀 듯 내려앉은 시골집에서 늘 물통을 들어다 주며 함께한 친구의 칭찬과 미술선생님의 참 잘 그린다라는 말 한마디가 마법처럼 자신을 그림의 세계로 내몰았고, 파도 치는 보리밭을 바라보며 그 황홀한 풍경을 그리겠다는 수많은 생각들은 결국 십 수년이 흐른 뒤에야 넙적 붓의 붓질에서 보리파도가 완성됨을 느끼는 순간의 찬란한 희열을 맛보게 된다. 이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느껴 봄직한 기쁨 그 자체라 생각된다. 때문에 바람은 신의 붓질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울림, 소리, 고요 등이 화면을 일구는 매력으로 자리잡는다. 이는 풍경소리에 깨인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과 같은 경험이라 할 것이다. 인연인지 첫 개인전 때 한 스님이 그림과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어서 이유를 물으니 “그림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고 있었다. 그림이 무척 맑은데 맑음을 지키려면 힘을 길러야 하고 그 힘은 상을 없애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유년, 중장 년, 노년을 동시에 간직한 것이니,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멸이 곧 탄생과 한 몸임을 알고, 부모와 형제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의 방향 즉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임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격한 삶의 파장을 겪은 김연주의 붓질은 우주의 운행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때로는 태양을 향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때로는 바람결처럼 수평을 유지하면서 그 흔들거림의 곡선이 소리로 전해져 달밤의 낭만을 느끼게 한다. 천둥과 번개의 파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스미는 고요 속에 몸을 맡기듯 부드럽고 감미로운 현의 울림이 금방 귓전에 스미듯이 다가온다. 격변의 세계 속에서도 원색의 강렬함이 붓질의 속도라는 시간의 과정에서 부드럽게 정제되어 나뭇잎이 일렁이듯 가볍게 너울거리는 모습이 숲에 잠기고, 바다 심연의 깊이로 침잠하듯 형상을 품어 안는다. 그러기에 빨강, 파랑, 노랑으로 엮이며 근접한 자연은 어릴 적 보리밭의 일렁임을 파도라 칭하며, 소리까지를 흡입하는 표현의 진통을 넘나들며, 잉태와 출산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호수가 마을을 담그는 대낮의 정적과 여름날 숲을 머금은 새들의 지저귐이 동시에 울리는 김연주의 화폭은 그가 버리고 비워내는 마음공부의 지난한 결과물로서의 영원한 풍경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