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는 원색의 색 면들, 그리고 이러한 색 면들이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작은 움직임...그것은 미세한 떨림과도 같이 은밀하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실체로 표현되는 물결의 기계적인 파장이나 물리적인 현상의 재현이 아니다. 이를 특정한 모양이나 상태로 간주해 버리기에는 그 안에 담겨진 내밀한 감성이 너무도 여리고 섬세하다. 굳이 큰 소리로 외치기보다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며 속삭이는 듯 한 작은 울림과 떨림은 모양이 아닌 빛으로, 그리고 흔들림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엇을 담고 있을까? 저 작고 여린 색 면의 움직임들은....
원색의 맑고 선명한 색감들은 백색과 어울려 적절히 다스려졌다. 원색의 강한 개성들은 본연의 빛은 유지하되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화면을 이룬다.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융합하며 색과 색은 서로 섞이고 부딪치는 가운데 언뜻 형상을 드러냈다가는 이내 그것을 감추어 버린다. 보였다가 사라지고, 드러났다가는 숨어버리기에 보는 이에게는 온갖 상상이 유발되며 여운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되는 소소한 행위를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상처럼 잔잔하고 담담하다. 무엇을 담고 있을까? 저 형상 너머에 자리하는 내밀한 감성들은 ....
당초 모양을 취하지 않았기에 그의 화면에서 형상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형의 틀로 구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모양을 바꾸며 온갖 사념을 자아내는 비정형의 뜰이다. 때로는 구름처럼, 또 때로는 물처럼 흐르고 일렁이며 상황과 조건에 따라 모양으로, 혹은 느낌으로 드러나는 사념의 조각들이다. 모양을 고집하지 않기에 형상에 얽매임이 없고, 또 굳이 특정한 내용이나 사변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저 보는 이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화면 앞까지 인도할 뿐이다. 그렇기에 색 면들 사이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는 내밀한 사념을 읽어 내는 것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작가는 무심한 듯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 조용한 침묵은....
화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색 면들은 분명 화사하고 밝은 원색들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화면은 경쾌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일렁이는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같이, 또 때로는 가볍게 뺨을 간질이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은근하다. 동요의 해맑고 천진한 리듬같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조형의 틀에서 퍼져 나오는 운율은 그렇게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서정의 리듬이며, 감성의 펼침이다.
원색의 붓질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은근하고 잔잔한 리듬과 운율은 작가의 감성을 내재한 채 그렇게 화면을 타고 흐른다. 그것은 정녕 색으로 치환된 수많은 언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작가가 감내하여야 했던 수많은 사연들과 삶의 곡절들을 원색으로 정화시켜 무심한 듯 경쾌하고 맑게 펼쳐 보이는 것이리라. 굳이 힘주어 말하거나 과장하지 않기에 그 말들은 더욱 애잔하고, 섣불리 읽혀지지 않는 절제된 표현이기에 그 사연들은 오히려 절실하다. 이에 이르면 그의 화면은 그저 해맑고 천진한 동심의 서정이나, 온실에서 곱게 자라 아름답지만 유약한 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절실한 사념의 세계라 할 것이다. 그 사념은 어렵사리 다스려져 평온한 듯하지만, 순간 작은 움직임에도 이내 파문을 일으키고 파장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멈춤과 움직임을 반복하며 특유의 감성을 발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는 아예 눈을 감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굳이 모양 없는 것을 취하여 대상으로 삼고, 이를 반복적인 작업과정을 통해 조형으로 수렴해 낸다. 그것은 바람이요 구름이고 물결이며 하늘이고 달그림자다. 분명 현상으로 존재하지만 형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비정형의 대상들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감춰진 것에 대한 진실하고 절박한 사유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존재하지만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눈을 감아 버렸기에 오히려 더욱 또렷하고, 보이지 않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변적인 구조를 지닌 사유의 산물이며, 조형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물들은 그저 이러한 사변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인 셈이다. 굳이 형상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재치를 통한 기계적인 기능을 추구하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일 것이다. 담백한 색 면들의 단속적인 리듬과 이들이 이루어내는 작고 내밀한 움직임은 비록 특정한 형상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을 반드시 어떠한 고정된 사물이나 현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 가는 곳, 그리고 생각이 머무는 자리를 따라 부유할 뿐이다. 그것의 실체는 정녕 형상이 아니라 상념이라 할 것이다.
작고 여린 미세한 떨림을 지닌 원색의 붓질을 통해 일상의 뜰에서 건져 올린 상념의 조각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 읽혀진다. 그것은 비록 밝고 맑은 원색의 화사함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가공되고 다스려져 순치된 감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특정한 형상을 고집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상념의 본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작가 스스로 온전히 모든 것을 감내한 채 보는 이의 시선을 조용히 관조할 뿐이다. 작가가 언뜻 드러나는 형상 너머에 숨겨 놓은 것은 바로 쉽게 읽혀질 수 없는 상념의 본질일 것이다. 그것은 순치되고 다스려 졌기에 보는 이의 눈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한 조형의 형식으로, 혹은 또 다른 상상과 사유의 단서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조용히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보는 이와의 소통일 것이다. 그것은 극히 조심스러운 접근과 섬세한 읽음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읽음의 입구와 공감의 단서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내밀하기 때문이다.
